'공부 못하면 안 뽑는다' 日 고시엔 우승팀이 韓 야구에 던지는 교훈
2023.10.28 10:37:30

[스타뉴스 |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2022년 고시엔 대회에서 타석을 준비하는 한 선수의 모습. /AFPBBNews=뉴스1

 

지난 8월 막을 내린 제105회 여름철 고시엔 고교야구대회에서는 우승을 차지한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고교가 최대 화제였다. 흥미롭게도 게이오고가 일본 내에서 관심의 초점이 된 이유는 야구 때문이 아니었다. 게이오고는 사실상 야구 특기생이 없는 학교였기 때문이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명문 사립 게이오 대학의 자매학교인 게이오고는 일본의 야구 명문교들과 달리 스포츠 추천입학제도(스포츠 특기생 입학제도)가 특별하다. 게이오고는 학생 선수가 야구에 남다른 재능이 있다고 해도 입학을 허용하지 않는다. 상당한 수준의 학업 능력이 있는 학생 선수만 선발한다.

게이오고는 서류심사에서 중학교 9과목에 해당되는 내신점수가 모두 합쳐 38점 이상(9과목 만점 45점)을 기록해야 하며 문화나 스포츠 활동에서도 뛰어난 실적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다 면접과 글쓰기 시험까지 치러야 한다. 매일 야구 연습을 해야 하는 학생 선수로선 게이오고의 높은 관문을 넘어서기 매우 힘든 셈이다. 올해 여름철 고시엔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게이오고의 선발 멤버 9명 가운데 8명이 이 기준을 통과한 선수였다.


관중에게 인사하는 고교 선수들. /AFPBBNews=뉴스1

 

그럼에도 게이오고 야구부는 어떻게 고시엔 정상에 오를 수 있었을까. 물론 최근 실력이 출중한 선수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이오고 야구부는 이들에게 강압보다 자율적인 면을 강조했다. 훈련과 시합에 임하면서 늘 야구를 즐겨야 한다는 게이오고의 야구 철학인 '인조이 베이스볼'은 야구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다. 실제로 대부분의 게이오고 야구 선수들이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 진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중에는 대학 시험을 치러 스포츠와 무관한 학과에 진학하는 학생 야구 선수도 적지 않다.

자연스럽게 학과 성적이 좋지 않은 선수는 훈련과 시합에서 제외된다. 1983년과 1985년 PL학원의 여름철 고시엔 대회 우승을 이끌었으며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일본을 대표하는 장타자였던 기요하라 가즈히로(56)의 차남으로 현재 게이오고 2학년인 기요하라 카츠지도 학과 성적 때문에 유급해 야구부 훈련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처럼 '공부하는 학생 선수' 육성을 추구하는 게이오고 야구부에 '아빠 찬스'의 자리는 없다.

일본 고교야구 선수들은 대부분 머리를 짧게 깎아야 하지만 게이오고는 오래 전부터 '두발 자율화'를 택했다. 야구 선수로, 또는 일반 사회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사는 데 있어 '머리 길이'로 상징되는 규율이 반드시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게이오고는 장시간 야구 훈련도 하지 않는다. 이는 최근 일본 사회의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게이오고의 야구 감독인 모리바야시 다카히코(50)는 지난 9월 일본 월간지 문예춘추와 인터뷰를 통해 "직업 선수가 되려는 학생들에게 야구라는 종목은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지도자 라이선스가 잘 갖춰져 있는 축구나 반나절이면 연습이 끝나는 농구와 같은 종목을 학생에게 시키는 게 더 매력적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팀 훈련을 해야 하는 시간도 길고 부상의 위험도 큰 야구의 종목적 특성 때문에 저출산 시대에 야구는 적합하지 않다는 사회적 시각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이를 감안해서라도 모든 일본의 고교 야구부가 장시간 야구 훈련에만 몰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센다이 이쿠에이 고교 선수들이 지난해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 우승한 뒤 기뻐하고 있다. /AFPBBNews=뉴스1

2022년 고시엔 대회에서 패배에 눈물 흘리는 선수들. /AFPBBNews=뉴스1

 

일본 고교야구 팀은 4000개에 육박한다. 이 가운데에는 여러 부류의 팀이 존재한다. 게이오고처럼 사실상 야구 특기생이 없는 학교도 있고 전원 야구 특기생으로 이뤄진 야구 명문교도 있다. 여기에 일반 학생과 야구 특기생이 함께 야구부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학교도 적지 않다. 이런 학교 야구부에는 일반 학생이 꼭 야구 선수로 뛰진 않더라도 매니저나 기록원, 홍보 담당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들은 정말 야구가 좋아서 공부를 해야 할 시간을 쪼개 야구부 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야구부뿐 아니라 일본 고등학교 스포츠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현상은 일본의 부카츠(부활동) 제도와 관련이 깊다. 부카츠 제도는 스포츠부 활동뿐 아니라 음악, 미술, 영화,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과 외 활동을 의미한다. 1968년 일본 문부성 학습 지도 요령에 등장한 부카츠는 1972년 일본 중고등학교에서 의무화된 제도로 최근에는 자발적 선택과목으로 자리잡았다.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야구의 경우에는 부카츠 제도 도입으로 일반 학생들이 활동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일반학생과 야구 특기생이 함께하는 고교야구 팀이 고시엔 대회 본선에 출전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본 고교 야구부에서는 학교 교사를 겸하는 야구 감독들도 늘어났다. 고교 야구부에서 감독은 단순히 야구를 기능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교육자여야 한다는 측면이 강화된 셈이다. 현재 MLB(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최고의 스타 오타니 쇼헤이(29·LA 에인절스)에게 고교시절 이도류(투타겸업)의 길을 열어줬으며 인성교육까지 해줬던 사사키 히로시(48) 감독도 지리, 역사, 윤리를 합쳐 놓은 지력공민(地歷公民)과목을 담당하는 교사다.

야구 특기생이 없는 게이오고와 같은 학교가 또다시 고시엔 대회 정상에 오르는 건 매우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런 학교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야구 선수가 육성될 가능성도 그리 높지는 않다. 하지만 다양한 형태로 운영되는 일본 고교야구의 힘은 유망주 육성뿐 아니라 미래의 충성도 높은 야구팬을 만들어 '야구 시장'을 확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공부하는 학생 선수'를 지향하는 한국 야구에도 교훈이 될 만하다.



이종성 교수.